예술이 된 나이프, 확고한 신념
금속공예, 나이프
빨간 낙타
2020.10.23


빨간 낙타로 알려진 정일문 작가의 작업실은 금속을 다루는 거친 도구들이 가득했다. 배경음악으로 잔잔히 흐르던 보사노바 리듬의 재즈 음악이 얼핏 차가운 공간에 따뜻한 느낌을 불어 넣고 있었다. 바이크를 커스터마이징하고, 은으로 악세서리를 만들고, 교과서에 그림을 그려 넣는 일을 한다는 작가의 직업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웠다. 여러가지 일을 하고 있었지만, 그가 작가로 불리고 싶어하는 분야는 따로 있다. 바로 나이프를 만드는 것. 나이프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꿈을 펼쳐내는 작가는 누구보다 확고한 작가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 처음 만든 칼



우리나라에서 칼이라는 것은 필요와 사용이 매우 제한적이다. 특히 요리를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전문적인 칼이 사용되는 경우는 찾기 어렵다. 그럼에도 작가가 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앞마당에서 매일 같이 검도를 수련하시던 아버지를 보면서 자란 까닭이다. 진검을 찾기 어려웠던 작가의 부친은 직접 칼을 만드셨고, 철을 벼리는 과정에서 튀는 불꽃에 매료되었다. 그 이후로 작가가 처음으로 칼다운 칼을 만든 것은 고등학생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마음에 들었냐는 질문에 작가는 엉망이었다며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그 칼은 작가의 작업실 한 벽면에 소중히 걸려 있었다. 


재료의 혼합, 끝나지 않는 실험



처음엔 그냥 철을 두드려 모양을 만들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만든 칼은 종이 한장 자르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무뎠다. 강한 불에 달구고 망치질을 하는 과정을 몇번이고 거듭해야만 철은 강철이 되었고, 비로소 칼의 기본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칼을 만들 수 있게 되자, 자연스럽게 소재에 대한 연구가 이어졌다. 철에 탄소가 어느 정도의 비중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실험을 했고, 황동을 섞어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때론 바이크의 체인을 녹여 형태를 변형해보기도 했다. 또 손잡이에 들어가는 재료에 대한 실험도 멈추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작가는 칼이 가진 순수한 아름다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작가에 있어 칼은 실용을 넘어선 예술이 되었다. 



흔들림 없는 확고한 작가정신 



작가는 누구보다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다. 국내에서 칼을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법률적 제한을 지켜야 했고, 부족한 재료는 별도로 수입을 해와야만 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작가의 작업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작가의 작품이 담겨 있는 서랍을 열자 고민이 끝나지 않아 손잡이가 얹혀지지 않은 칼날들이 수두룩 했고, 작가의 작업 노트엔 물질화되기를 기다리는 스케치들이 가득했으며, 작업실 한켠에 놓인 모루는 작가의 수없는 망치질을 견뎌온 긴 세월을 문신처럼 품고 있었다. 칼을 통해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펼쳐내기 위해 꾸준히 작가로서의 삶을 이어나갈 것이라 말하는 작가의 목소리엔 그 어떤 말보다 단단한 심지가 느껴졌다. 칼을 하얀 전시장에서 보여줄 것이라는 그의 꿈을, 인터뷰를 마칠 때 즈음엔 나 역시 믿을 수 밖에 없었다.